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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여름이 끝날 무렵이었다. 제임스 얀시는 로스 앤젤레스의 시더스 사이나이에 위치한 병원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는 걸을 수 없었다. 거의 말도 하지 못했다. 지난 해 겨울과 이듬해 봄을 거의 병원에서 지내며, 불치의 희귀 혈액병과 합병증으로 치료를 받던 그는 다시 입원을 했다. 그의 육체가 그를 죽이고 있었다. 그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것은 잔인한 과정이었다. 하지만 병마도 그를 전자 드럼 머신 앞에서 떼어놓지는 못했다.

메마른 하얀 병실에서, 그의 악기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턴테이블, 헤드폰, 수많은 레코드들, 샘플러, 드럼 머신과 컴퓨터. 그의 어머니와 LA를 기반으로한 스톤쓰로 레코드 레이블의 친구들이 그의 병실을 드나들었다. 때로 그의 주치의가 얀시의 헤드폰으로 직접 비트를 들으며 힙합계 최고의 인물 중 하나로부터 교육을 받기도 했다.

얀시는 그의 손이 너무 부어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자신의 악기들을 만졌다. 고통이 너무 심할때만 그는 휴식을 취했다. 뼈의 고통이 사라질때 까지 어머니가 그의 손을 마사지해주었다. 그러고나면 그는 다시 일하기 시작했다. 때로 그는 한밤중에 어머니를 깨워 자신을 침대로부터 휠체어로 옮겨달라고 부탁해야만 했다. 그렇게해서 그는 자신의 컴퓨터에 저장되어있는 신디사이저 위에 비트를 얹을 수 있었다. 얀시는 의사에게 자신의 작업이 자랑스럽다고 말했으며, 앨범을 완성하는 것만이 그가 원하던 일이었다.

9월이 다 가기 전에 그는 "Donuts" 완성까지 두 곡만을 남겨두었다. 이 앨범은 그의 생일인 2월 7일에 발매되었다. 그로부터 3일 후 그는 사망했다.

제이디나 제이 딜라로 더 알려진 얀시는 디트로이트 힙합 사운드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인정받았다. 어떤 사람들을 그를 창조적인 천재라 불렀다. 그의 거칠지만 소울풀한 비트와 음악적으로 타이트한 프로듀싱 스타일은 세계 각지의 랩과 R&B 스타들 - 칸예 웨스트에서부터 자넷 잭슨, 에리카 바두에 이르기까지 - 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제이디와 작업을 했었다.

그는 디트로이트의 얼반 음악계에서 90년대 중반 챔피언으로 군림했다. 당시 이스트와 웨스트로 양분되던 힙합계에, 그는 완전한 디트로이트의 색깔을 선보였다. 그리하여 아직 알려지지 않았던 에미넴이나 D-12, 제이디 자신의 그룹이었던 슬럼 빌리지에게 영감을 제공했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며 그는 고향의 언더그라운드 커넥션과 일하며 상업적이지 않은 힙합 씬에서 챔피언으로 생각되기 시작했다. 그가 그보다 큰 명성을 막 얻으려고 할 때 그는 아프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그는 4년간 병원을 들락거려야 했고 병원비를 치르느라 고생했다.

원인은 불치의 희귀 혈액 질병이었지만 그로 인한 합병증이 더 많았다. 관절에 무리가 왔고 혈당이 높아졌으며 면역 체계에도 문제가 생겼고 심장에도 이상이 생기며 루푸스로 추정되는 진단을 받았다.

그가 아프다는 소문이 힙합씬에 돌기 시작했지만 구체적인 그의 건강상태는 비밀에 부쳐졌다. 얀시는 자신의 문제를 남들이 알아주길 원하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죽음이 가까이 와 있었다.

그의 죽음 이후, 팬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그의 작품들을 추모하기 위해 모였고 그러한 분위기는 오늘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처음으로 얀시의 고통을 직접 지켜본 이들이 - 그의 어머니와 의사를 포함해서 - 그의 마지막 날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2002년 1월, 뭔가가 잘못되었다.

얀시는 슬럼 빌리지의 'Fantastic, Vol.2'가 처음으로 발매된 지 2년 후인 2002년 1월, 유럽에서 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이후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그는 자신의 집인 클린턴 타운쉽으로 돌아가는 대신 감기에 걸린 것 같다는 불평과 함께 디트로이트 동부에 있던 부모님의 집으로 향했다.

그건 특이한 행동이었다. 어렸을때도 그는 자신의 사생활을 중요시했다. 하지만 그 날 밤, 얀시는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낫게 해주기 위해 어머니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그는 복통을 호소했고 열이 있었다. 자리에 눕고 나서는 더욱 아프다고 했다. 어머니가 그를 그로스 포인트에 있는 본 세쿠어스 병원의 응급실로 데려갔다. 그의 혈소판 수치는 10 이하였다. 정상인의 수치는 140~180이다. 의사들은 제이디의 어머니 머린 얀시에게 그가 아직도 걸어다니는 것이 신기하다고 말했다.

곧 하퍼 병원에서 전문가가 파견되었고 희귀 혈액 질병이 혈소판 수치를 낮춘 것으로 진단했다. 비정상 세포들이 정상 세포들을 먹어 치우고 있었다. 의사들은 직접적인 치료법은 없다고 말했다. 얀시는 1달 반정도 입원했다. 몇주 후 그는 같은 증세로 병원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러한 일이 앞으로 4년간 계속되었다.

무시무시한 질병에도 불구하고 얀시는 병을 진단받은지 2년 후에 LA로 이사했다.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의 룸메이트가 되었던 랩퍼 커먼과의 작업을 포함해서 몇몇 일들이 잘 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그의 건강은 악화되었고, 그는 혈액병 전문가를 만났다. 그 전문가는 살고 싶으면 약물과 병원 치료를 견뎌내야만 한다고 말해주었다. 2004년 11월, 제이디는 간병을 위해 어머니께 LA로 와줄 것을 부탁했다.

신장으로 병이 옮아가다

어머니가 LA에 도착한 직후, 얀시는 병원에 입원했고 2005년 3월까지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병원에서 잠을 자며 결코 얀시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아들의 건강 문제로 인해 허리가 휠 지경이었다. 물론 병원비의 문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항면역, 항염증 스테로이드를 맞아야했다. 투약으로 인해 그의 면역 체계를 향상시켜 주기 위한 것이었으나 혈당이 올라가는 바람에 그는 투약을 중단했다.

TTP로 인해 신장의 기능을 잃게 되었다. 그의 신장은 쓸 수 없었다가 살아나기도 했고 다시 쓸 수 없게 되기도 했다. 일주일에 세번씩, 4시간 가량 진행되는 투석 치료가 때로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는 기계에서 떨어지기도 했다.

오랜 기간동안 침대에 누워있다보니 그의 다리는 기능을 잃어 걸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휠체어나 목발, 지팡이가 필요했다. 나중에 그는 이런 것들을 이용해서 음반 가게에 음반을 사러 가거나 편의점에 주스를 사러 가곤 했다. (이것도 치료의 일환이었다) 때로 그는 음식을 삼키는 법도 잊어버려 다시 배워야하곤 했다. 그는 몸무게의 절반을 잃었다.

"그가 외출을 하려고 준비를 하고 나면 다시 아프곤 했어요." 머린 얀시는 말한다. "그는 병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지겨워 했습니다. 그는 늘 병상에 있었거든요. 때로 그냥 그를 보고있으면 슬펐어요. 그는 하고 싶은 것들을 하지 못하고 있었죠."

2005년 그의 생일을 몇주 앞두고, 의사들은 그에게 루푸스를 진단한다. 루푸스는 만성 염증성의 질병으로 피부와 관절, 혈액과 신장에 영향을 준다. 의사는 아마도 혈소판 수치가 낮아지거나 몸이 자주 붓게되고 손에 고통이 올것이라고 말했다.

확실히 오랜 기간의 투병이 원치않았던 결과들을 가져오고야 말았다. 음악에 손댈 수 없었고, 레코드 박스에서 판을 꺼낼 수도, 음반을 만들 수도 없었다. 이러한 좌절들이 투병 기간이 끝이 없는 것 처럼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엄청난 병원비

비록 그가 미국 TV 라디오 스타 조합 보험에 들어있기는 했지만, 얀시의 질병은 깊었고 그는 스스로 많은 돈을 지불해야만 했다. 장기간의 입원비용만 해도 매번 20만달러에 육박했으며 일주일에 세번 받던 치료는 1800달러, 1주일에 한번 맞던 헤모글로빈 수치를 높이는 주사는 매번 1800달러. 그는 많은 약들을 먹어야 했는데 약값은 700~900 달러, 어떤 때는 한병에 2000달러씩 하기도 했다. 그와 더불어 그는 전문가와 상담을 했기 때문에 일주일에 6700달러를 지불해야만 했다.

최근 자신도 거의 매일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머린 얀시는 아직도 병원 비용을 다 내지 못한 상태라고 한다. 그에 대한 제이디의 계획은 더 많이 음악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돈을 벌어 병원비를 내고 디트로이트에 있는 자신의 딸들에게 돈을 주기 위해 윌 스미스와의 프로젝트 또한 기획했다. 병원비를 치르기 위해 머린 얀시는 남은 평생을 일해야 한다고 말했다.

디트로이트의 친구들

디제이 하우스 슈즈로 알려진 마이크 뷰캐넌은 베버리 힐즈에 있는 스트리트 코너 뮤직에서 90년대 중반 얀시를 만났다. 하우스 슈즈는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고 당시 얀시는 프로듀서를 지망하며 앨범을 모으고 있었다.

얀시가 LA로 이사를 간 후, 그들의 우정은 소원해졌다. 2005년 초에 하우스 슈즈는 얀시가 혼수상태라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CD들을 싸가지고 - 랜덤 비트 CD들, 믹스테잎들 등 그가 발매했던 것이나 얀시가 듣고싶어 할만한 것들 - LA로 날아갔다. 그는 일주일간 매일같이 병원에서 얀시와 함께했다. 그의 친구는 이전과 달라보였다. 더 작아졌고 조용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하우스 슈즈는 친구의 구체적인 병에 대해 묻지 않으려고 애썼다.

"저는 아무렇지 않은척 했어요." 하우스 슈즈는 말한다. "그렇게 하기가 정말 지옥같이 힘들었죠."

병원에서 맞이한 생일날 얀시는 그가 좋아하는 초콜렛 케익을 그의 레이블인 스톤 쓰로로부터 받았다. 또한 생일선물로는 디트로이트 거리의 사인들이 담겨있는 야구 저지를 받았다. 그리고 개인적인 선물이 또 있었다. 하우스 슈즈가 디트로이트에서 35명 정도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얀시와 아는 사이였고 어떤 사람들은 그를 만난 적도 없지만 그가 힙합에 기여한 바를 존경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우스 슈즈는 그들에게 생일 축하와 건강 회복을 바라는 인사를 보이스 메일로 남기도록 했다.

"야, 이 여자가 남긴 굉장한 메시지좀 들어봐." 하우스 슈즈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핸드폰을 얀시의 귀에 대주었다. 그리고 얀시는 35개의 메시지를 모두 들었다. 그는 무너져서 울음을 터뜨렸다.

자신의 상태를 숨긴 제이디

얀시는 자신의 상태가 얼마나 나쁜지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았다. 2005년 초 병원에서 나온 뒤 - 힙합 사이트들의 메시지 보드에 그가 혼수상태라는 이야기들이 나왔다 - 그는 힙함 잡지 XXL과의 6월호 인터뷰에 기꺼이 응했다.

이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이 혼수상태였다는 사실을 부인하며 해외 여행중에 병에 걸렸다고 말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2주 정도 해외에 나갔었는데 이상한 음식들을 다 먹고 다녔죠. 돌아오자마자 감기 비슷한 것에 걸려서 병원에 갔습니다. 검사를 받아보니 신장에 균열이 생겼다고 하더라고요,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않아서 그렇답니다. 되게 간단한 거였는데 결국 입원까지 하고 말았죠."

그의 어머니와 의사만이 얼마나 제이디의 상태가 안좋은지를 알고 있었다. 디트로이트의 랩퍼 프루프 또한 얀시의 다른 많은 친구들처럼 그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우리는 병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안했어요." 프루프는 말한다. "제가 '몸은 좀 어때?'하고 물어보면 그는 '나아졌어'하는 식이었죠."

성경으로 위안을 얻다

얀시는 자신의 생의 마지막 해에 좀더 철학적이 되었다. 그와 어머니는 욥의 이야기를 공부했고, 그로 인해 왜 죄 없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지를 이해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성경 공부가 믿음과 인내심을 키워주었다.

그의 의사는 제이디의 질병과 익숙해져야만 했다. 닥터 애론 빅은 말한다. "그는 좋은 환자는 아니었어요. 치료가 힘들었을뿐만 아니라 그는 병원에 오려고도 하지 않았거든요. 그는 매우 영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무슨 말인지 알아요 의사 선생님. 그렇지만 이건 제 인생에서 제가 내린 결정입니다'라고 말하곤 했어요. 인간적인 관점에서 그의 그러한 태도를 존중합니다. 그는 필요한 치료는 받았어요. 결코 병이 자신의 인생을 방해하도록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인생이 우선이었죠. 우리가 알기도 전에 그는 이미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하곤 하더군요.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도 평화롭게 만들어주었죠."

얀세이는 32번째 생일은 LA의 집에서 맞이했다. 룸메이트인 커먼이 생일 케익, 물론 초콜렛, 을 준비했고 피넛 버터 울프와 매드립 등 힙합 언더그라운드의 친구들이 도넛 모양의 케익을 가져와 그날 발매된 'Donuts' 앨범을 기념했다. 얀시가 사람들이 자신을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불편해했기 때문에 그들의 만남은 짧았다. 그들은 문앞에 케익을 놔두었다. 얀시는 아주 작은 조각만을 먹었다. 케익은 그에게 고통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퇴원 후 한달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그는 막 다시 음식을 삼키는 법을 배웠다. 목소리가 강하게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때로 그는 아예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목발을 짚은 채 집안을 돌아다녔다. 휠체어를 뗀지는 몇주나 지난 상태였다.

"그 당시에 다른 어느때보다 뭔가가 잘못되었다고 느꼈습니다." 피넛 버터 울프는 말한다. "몇주 전만해도 휠체어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에너지가 넘쳐 음악과 장비들을 보여주고 아직도 디트로이트에 있던 장비들을 LA로 옮겨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어요."

고통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행복했다. 그의 한가지 소원은 이루어졌다. 4년만에 그는 병원이 아닌 곳에서 생일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괜찮아 질거야

생의 마지막 날들에서, 그는 계단을 오르내리기도 했고 어머니와 진심어린 대화들을 나누었다. 그 대화들은 짧았지만 깊이있는 것이었다.

"어머니 제가 사랑하는거 알죠? 저에게 해준 모든 것들에 감사해요"
"그런 말은 할 필요 없단다."

그와 그의 어머니는 치료 과정을 견딜 수 있도록 종교에 힘썼다. 그들은 모든 것들이 괜찮아질 거라는 의미로 하이파이브를 했다. 생일 다음날, 집에서 그는 손을 공중에 들고 어머니를 기다렸다. 그녀는 당황했다. 그날은 치료가 없었는데, 그가 왜 이러는 걸까? 그는 어머니에게 하이파이브 해달라는 모션을 계속 취했다. 그녀가 하이파이브 하기 전까지 그는 손을 내리기를 거부했다. 마침내 어머니가 누그러져서 하이파이브를 해주었다.

"이게 제가 말하려는 거예요." 제이디는 말했다. "우리는 함께이고, 모든게 다 괜찮아요. 어머니도 괜찮아 질거예요. 제가 약속해요 정말로 괜찮아 질거예요."

BY KELLEY L. CARTER (FREE PRESS MUSIC WRITER)
번역 이용훈 (http://yhfacto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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